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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000년의 기다림 - 조지 밀러가 그린 현대판 천일야화

영화 감독 ‘조지 밀러’라고 하면 대부분 관객들은 ‘매드 맥스’ 시리즈를 떠올릴 것입니다. 특히 세계를 강타했던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는 사람들에게 매드 맥스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이런 감독이 어린이 3D 애니메이션 ‘해피 피트’를 만든 것도 의외일 것입니다. 여기에 그의 더 넓은 상상력과 표현력을 증명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2023년 1월에 개봉했던 ‘3000년의 기다림’입니다.

기념품에서 전설이 나오다

알리세아(틸다 스윈튼)는 정신이 쇠약하고 건조하게 사는 문학 학자입니다. 이스탄불로 출장갔다가 시장에서 신비롭게 생긴 푸른 유리병을 하나 사게 됩니다. 별 생각 없이 호텔로 돌아온 알리세아는 유리병의 그을림을 닦으려다 병을 열게 됩니다. 놀랍게도 유리병에서 나온 건 호텔 방을 가득 채운 거대한 정령 진(이드리스 엘바)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평소 보던 환영인 줄 알았으나 결국 실재하는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풀어준 감사의 표시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합니다. 알리세아는 그 와중에서 침착하게 진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그를 인터뷰를 하고 진은 역사와 전설 그 어딘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정령 '진'

본래 진이란 아랍 전승에 나오는 초월적인 존재로, 신일 수도 있고 정령, 몬스터, 악마 등 다양하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진은 문화권에 따라 파란색 인간이나 흑인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 지니'라는 모습이 제일 친숙할 것입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버전 '알라딘'에서는 파란색 요정같은 모습이었고, 디즈니 실사영화 '알라딘'에서는 윌 스미스 님이 분한 흑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번 '3000년의 기다림'에서 '진'은 뾰족한 귀에 짐승의 하반신을 가진 흑인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특정 지역의 전승에 부합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해당 문화권에서는 익숙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니'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독촉하는 유쾌한 요정이라면, 이드리스 엘바의 '진'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도 대화에 순순히 응하고 지적 호기심과 철학적 궁금증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인간보다 오래 살아왔지만 사랑, 배신, 음모, 욕망 등에 휩쓸리며 오랜 시간을 떠돌아 온 존재였습니다. 수많은 욕심과 욕망의 인간을 겪으며 갇혔다 풀렸다를 반복하며 지금의 알리세아를 만나지만, 그녀는 그가 만나온 존재들 중 가장 신비하고 궁금증을 일으키는 존재였습니다.

알리세아는 천성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외로움에 의해 상상의 친구를 만들었습니다. 상상을 하지 못하게 두통이 발생하면 없어지지만 그 외에는 곁에 있어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그녀는 점점 성장해가며 그런 상상이 유치해진자고 생각했고, 결국 그의 존재가 기록된 노트를 태우면서 상상의 친구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은 지금은 상상의 친구보다 더 상상적이고 믿기 어려운 존재인 '진'을 맞닥뜨렸고, 그녀는 학문적 탐구심과 호기심으로 '진'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을 주인공의 이야기의 도구로 쓰되 '소원들어주기'란 기능을 이야기의 도구로는 쓰지 않습니다. 소원은 아주 부가적인 작은 요소일 뿐, 주요 흐름은 둘 사이의 대화입니다. 만약 병을 연 사람과 병 속의 요정이란 입장만 제거하고 본다면, 둘은 처음 만난 소개 자리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를 하고 있는 남녀로 보이기만 합니다. 알리세아를 통해 진을 알게 되고, 진의 대화를 통해 알리세아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새로운 버전의 아라비안 나이트이기도 합니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과 관객이 보고 싶은 것

이 영화는 본토 미국에서는 크게 실패했습니다. 6,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지만 흥행 수익은 1,800만 달러에 그쳤습니다. 이는 영화 산업에서 상당한 손실로 간주됩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홍보가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고, 영화 자체도 관객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감독의 커리어 하이가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였습니다. 시종일관 아드레날린이 터지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 신작을 들고 온다면 관객들은 당연히도 화려한 화면과 액션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 영화는 시종일관 등장 인물들이 대화만 주고 받습니다. 심지어 대화 속 장면에서도 대화만 할 뿐입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인 '해피 피트'도 펭귄들의 노래와 춤이 있어 나름 다이나믹 했었습니다. 그에 비해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정적인 스토리텔링 뿐입니다. 이야기를 묘사할 때마다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화면을 보여주지만, 가장 중요한 알리세아와 진의 대화는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해외 일부의 시각에서는 배우들의 인종을 거론하며, 매력적인 흑인 남성이 외로운 백인 여성을 유혹한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경우 백인과 흑인과의 관계에 대해 굉장히 예민한데, 그것이 인종 혹은 성별의 차별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았을 땐 그저 배역에 충실했을 뿐 배우의 피부색과 영화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깊이 생각해봐도 '진'의 생김새가 아프리카인으로도 묘사되는 문화가 있어 그와 연결된다는 정도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잔잔한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찾는다면 추천

이 영화는 크게 자극적이지 않고 자칫 심심하고 지루해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마치 동화의 그것처럼 흘러갑니다. 천일야화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라푼젤과 같은 동화적 사랑 이야기를 즐기는 관객들에게 특히 추천합니다. 각종 짧은 영상으로 반짝 즐겁게 해주는 디지털 문화에 질린다면, 조금은 느리고 천천히 자극없이 흘러가는 이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거나 깊이 있는 스토리를 음미하고 싶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